4-1 기독교 종말의 징조

스마트폰을 중동에 수출할 때 이슬람 기도시간 알림 프로그램을 넣는다고 합니다. 모슬렘들은 해 뜨기 전, 정오, 오후, 해질 때, 해 진 후 하루 다섯 번 의무적으로 기도합니다. 이처럼 신실한 신앙생활은 스마트폰 기능에도 반영될 만큼 철저합니다.

2010년 16억이던 모슬렘 인구는 2030년 22억, 전 세계 예상 인구 83억 중 26.4퍼센트에 이를 것으로 전망됩니다. 세계 인구 4명 중 1명이 모슬렘이 되는 셈이며, 이는 코란과 기도에 대한 절대적 헌신이 맺은 열매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 현대 기독교는 서구에서 급속히 쇠퇴하고 있습니다. 유럽의 웅장한 교회들은 관광객만 드나드는 박물관이 되고, 미국의 도심 교회들은 관리비도 감당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습니다. 실제로 교회 건물이 술집이나 불교 사찰로 바뀐 사례도 있습니다.

미국 주류 교단들은 전반적으로 무너지고 있다는 평가를 듣습니다. 연합감리교회는 1960년대 중반 1,078만 명에서 2008년에는 약 772만 명으로 줄어 매년 7만5천 명이 교회를 떠난 셈입니다. 어떤 이들은 교회가 현대 문화에 적응하지 못한 결과라고 말하지만, 진짜 문제는 복음의 본질을 잃어버린 데 있습니다. 성경의 권위와 말씀 묵상 전통을 회복해야 합니다.


4-2 이사야 43장 1 장면묵상

이사야 43장 1절은 10초면 읽을 짧은 구절이지만, 보석 같은 진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깊은 수고 없이 은혜만 얻으려 하지만, 말씀의 보석을 찾으려면 갱도에서 흙을 파듯 진지한 묵상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문장으로 기록되었기에 ‘글의 법칙’을 따라 이해해야 합니다. 첫 문장의 주어는 “여호와”이고 동사는 “말씀하시느니라”이며, “이제”라는 부사는 “지금 말씀하시는 중”이라는 뉘앙스를 줍니다. 이 말씀을 듣는 이는 이사야 선지자로, “야곱아 … 이스라엘아 …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속에는 이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고 있는 장면이 담겨 있습니다.

“야곱아/이스라엘아”라고 부르는 이는 하나님이 아니라 이사야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직접 부르셨다면 “야곱아, 내가 말하느니라”라고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이어지는 “너는 두려워 말라 …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부터는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부분이기에 주어가 “내가”로 바뀝니다. 한 절 안에 먼저 이사야가 말씀을 받는 장면, 이어서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장면이 함께 담겨 있는 셈입니다.

“야곱”과 “이스라엘”이라는 두 이름 사용도 의미가 있습니다. “야곱”과 연관된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 곧 죄인 같은 인간 앞에 높이 계신 하나님을 드러냅니다. “이스라엘”과 관련된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빚고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자비로운 창조주로, 친밀히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창조하신”은 창세기 1장의 히브리어 “바라”와, “조성하신”은 창세기 2장의 “야차르”와 연결되며, 한 절 안에 초월과 임재의 하나님이 함께 드러납니다.


**4-3 “Lectio Divina(**렉찌오 디비나)” 이단인가? (1)

“Lectio Divina”라는 말은 생소하지만, 반응은 극단적입니다. 어떤 이는 이것이 기독교 회복의 길이라 말하고, 어떤 이는 단호히 거부합니다. 거부 이유 중 하나는 라틴어 용어라는 점이지만, 이는 설득력 없는 이유입니다. 루터의 “Sola Scriptura(오직 말씀)” 역시 라틴어였기 때문입니다.

Lectio Divina는 전통적으로 네 단계, 곧 읽기(Lectio), 묵상(Meditatio), 기도(Oratio), 관조(Contemplatio)로 설명됩니다. 12세기 카르투지오 수도원 부원장 구이고 2세가 라틴어로 쓴 편지 “수도사의 사닥다리”에서 이 네 계단을 소개한 후, 이 전통이 형성되었습니다. 이 라틴어 사용은 이것이 최근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약 800년 전부터 내려온 기독교의 영적 유산임을 보여줍니다.

천주교 전통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거부하는 태도도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전 1500년의 교회 역사와 신학을 무시하고는 개신교 전통 자체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칼빈의 예정론은 어거스틴의 사상을 잇고, 루터는 어거스틴파 수도사였으며, 웨슬리도 중세·천주교 영성가들에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구이고의 “수도사의 사닥다리”는 방대한 책이 아니라 약 20페이지 분량의 편지로, 성경을 어떤 마음으로 대하고 어떻게 묵상할지 간략히 제시합니다. 그가 제시한 Lectio Divina는 오늘날 그대로 사용해도 모자람이 없는 귀한 성경 독서 방법입니다. 오히려 성경 권위가 떨어지고 묵상을 잊은 시대에 다시 회복해야 할 중요한 전통입니다.

문제는 이 귀한 방법이 800년 가까이 거의 잊혀져 있다가, 20세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때 성경공부와 함께 다시 주목받았다는 점입니다. 이후 Lectio Divina는 다른 종교까지 확산되어, 코란 등 타종교 경전을 읽는 방법으로 차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Lectio Divina 자체는 교리나 사상이 아니라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방법”임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4-4 “Lectio Divina(**렉찌오 디비나)” 이단인가? (2)

Lectio Divina는 교리나 이단 사상이 아니라 성경을 읽는 네 단계(읽기·묵상·기도·관조)를 구조화한 방법입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무엇을 가지고, 무엇을 위해” 이 방법을 사용하느냐입니다. 무엇을 읽고 묵상하며, 누구에게 기도하고, 무엇을 관상하느냐에 따라 이단적 도구가 될 수도, 성경적 묵상 전통을 회복하는 통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이슬람 안에서도 코란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관상을 실천할 때 Lectio Divina와 유사한 절차를 차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1997년 미국에서 열린 학술 세미나를 계기로, 불교와의 대화 속에서도 Lectio Divina에 대한 관심이 확산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티베트 불교 신문에도 관련 글이 실렸고, 각 종교가 자기식으로 재해석하며 응용하기도 했습니다.

심리학자들 가운데는 Lectio Divina를 융의 네 가지 심리 기능(감각·직감·생각·느낌)과 연결시키는 시도도 있습니다. 감각 기능은 읽기, 생각 기능은 묵상, 직감 기능은 기도, 느낌 기능은 관상에 대응시킵니다. 이 융의 이론을 토대로 MBTI 성격 유형 검사가 만들어졌고, 이는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도 사용됩니다.

한편 개신교 안에서도 Lectio Divina를 통해 깊은 영성을 추구하는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장로교 목사 유진 피터슨은 성경 “The Message” 번역과 묵상집 “Solo”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Solo”는 1년 동안 매일 말씀을 묵상하도록 돕는 책으로, 피터슨은 이 책이 Lectio Divina에 기반한다고 밝힙니다. 그에 따르면 Lectio Divina는 성경공부라기보다 성경을 “경험하는” 방법입니다.

피터슨은 이 방법을 통해 성경 속으로 들어가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과 친밀히 대화하며, 말씀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런 점에서 Lectio Divina는 단순 지식이 아니라 삶을 변화시키는 영적 훈련으로 이해됩니다.


4-5 유진 피터슨의 “Lectio Divina” (1)

Lectio Divina는 약 800년 전 기독교 안에 있었던 성경 묵상 방법이며, 유진 피터슨은 이를 현대적으로 적용해 영성을 개발한 목회자입니다. 그의 묵상집 “Solo”에서 그는 구이고가 제시한 네 단계를 Read, Think, Pray, Live라는 동사로 번역해 소개합니다.

피터슨은 성경을 “하나님이 에덴의 어둠에서 천국의 영원에 이르기까지 그의 백성을 사랑하는 이야기”라고 정의합니다. 성경은 과거의 말씀 기록이자, 지금도 앞으로도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질 말씀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에게 주실 말씀도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성경을 깊이 읽다 보면 성경 안에 계신 하나님을 대면하게 되고, 그분 앞에 설 때 자기 진짜 모습을 보게 됩니다. 피터슨은 “우리가 성경을 읽지만, 동시에 성경이 우리를 읽는다”고 말합니다. 말씀을 읽으면 읽을수록 나 자신과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기에, 성경은 특별한 책이며 특별한 방법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가 말하는 “독서(Lectio)”는 한 구절 한 구절을 천천히, 신중하게 읽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만 주의를 기울이고, 순전한 믿음을 가지고 여러 번 반복해 읽어야 합니다. 이런 느린 읽기와 집중이 Lectio Divina의 첫 단계입니다.

두 번째 단계인 “묵상(Meditatio)”은 본문 속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먼저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본문에서 ‘내가 꼭 이런 음성을 들어야 한다’는 요구, 지금까지 들었던 해석과 선입견, 틀리게 해석할지 모른다는 두려움까지 내려놓아야 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각종 잡음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구별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워진 마음으로 본문에 집중해 반복해서 생각하다 보면, 어느 순간 오늘 특별히 강하게 다가오는 구절이 생기고, 그 안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의미 있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이것이 피터슨이 설명하는 묵상의 핵심입니다.


4-6 유진 피터슨의 “Lectio Divina” (2)

Lectio Divina의 세 번째 단계인 “기도(Oratio)”에서 피터슨은 두 가지를 강조합니다. 첫째는 “듣는 기도”, 둘째는 “읽은 말씀을 기도에 넣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첫째, 듣는 기도에 초점을 둡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지만, 실제 우리의 기도는 대부분 내가 말하는 쪽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건강한 대화에서 말하기만큼 중요한 것이 듣기이듯, 기도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말하기에 익숙한 사람에게 하나님 음성을 듣는 일은 쉽지 않으며, 이를 위해 마음의 귀, 영혼의 귀가 열려야 합니다. 예수님이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신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기도의 형식(무릎 꿇기, 눈 감기 등) 자체가 핵심은 아닙니다. 찬양하면서든, 조용히 걷다가든, 마음이 하나님께 열리면 어디서든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상태가 됩니다. 마음의 귀가 열리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듣는 사람의 상황에 따라 다르게 들립니다. “도적질하지 말라”는 한 구절도, 도둑질과 무관하게 살아온 사람에게는 도덕적 교훈의 음성이고, 현재 도둑질 중인 사람에게는 책망의 음성입니다. 죄책감으로 그만두려는 사람에게는 바르게 하라는 음성이고, 과거에 도둑질했지만 지금은 회개한 사람에게는 의로 교육하는 음성으로 들립니다. 같은 성경 구절이지만, 각 사람의 상태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역사하기에 성경은 살아 있는 진리입니다.

바울은 이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라고 정리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음성을 들려주시는 목적은 우리를 “선한 일을 행하는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어두운 세상을 밝히고, 더러운 세상을 정화하며, 악한 세상을 선하게 변화시키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피터슨은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것을 거듭 강조합니다.


4-7 유진 피터슨의 “Lectio Divina” (3)

앞에서 살핀 것처럼, 피터슨이 말하는 기도의 첫 번째 핵심은 듣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핵심은 Lectio Divina에서 읽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도의 내용으로 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욕구를 중심으로 기도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뜻과 무관한 요구들을 나열하고, 원하는 대로 응답되지 않으면 쉽게 좌절합니다. 그러나 기도를 하나님과의 대화로 본다면 대화의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어야 합니다. 반대로 우리가 주도권을 쥐고 하나님을 내 뜻대로 움직이려 한다면, 그것은 이미 기도 본질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기도가 바르게 되려면 대화의 중심과 주도권을 하나님께 넘겨드려야 합니다. 그 방법이 바로 “말씀이 기도의 중심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반석은 성경이며,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Lectio Divina에서 드리는 기도는 반드시 성경에 기초해야 하고, 독서를 통해 읽은 본문이 곧 기도의 내용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말씀 속에 들어 있습니다. 내가 읽은 본문이 내 기도의 주제가 된다면, 내 기도는 하나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 그 기도를 통해 내 삶이 변화되면, 그 변화가 곧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 삶이라는 증거가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진정한 교제입니다.

피터슨은 이해되지 않는 구절이 있을 때도 주석이나 다른 사람 설명으로 먼저 달려가기보다는, 그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께 묻고 깨달음을 구하라고 권합니다. 말씀을 품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면, 지혜의 하나님께서 반드시 필요한 깨달음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조종하거나 이용하려는 분이 아니라 사랑하시는 분이기에, “선한 일을 행하는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기 위해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결국 Lectio Divina에서 말하는 “기도(Oratio)”는 어떤 신비한 초월 명상이 아니라, 성경 말씀을 붙들고 드리는 기도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800년 전 구이고가 제시한 Lectio Divina를 정확히 이해하고, 기도를 일방적 말하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말씀에 주도권을 내어드리는 정상적인 대화로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4-8 유진 피터슨의 “Lectio Divina” (4)

지금까지 유진 피터슨이 소개한 Lectio Divina의 세 단계, 곧 읽기(Lectio), 묵상(Meditatio), 기도(Oratio)를 살펴보았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 단계는 “관조(Contemplatio)”입니다. 피터슨은 이 라틴어를 영어 동사 “Live”로 번역해 사용합니다.

그는 네 단계를 모두 명사가 아닌 동사(읽어라, 생각하라, 기도하라, 살아라)로 바꾸어, Lectio Divina가 머리에서 끝나는 이론이 아니라 실제로 행할 때 의미가 드러나는 훈련임을 강조합니다. “관조”는 단지 생각하는 상태가 아니라, 말씀 안에서 실제로 살아가는 단계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해도, 그 말씀이 삶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열매 없는 나무와 같습니다. 말만 가득하고 행동이 없다면, 잎만 무성해 예수께 저주받은 무화과나무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관조란 앞선 세 단계를 거친 말씀이 실제 삶으로 표현되는 마지막 단계입니다.

피터슨에 따르면 마음 문을 열고 말씀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면, 그 말씀은 내 존재의 한 부분이 되어 삶을 변화시킵니다. 말씀이 삶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내가 말씀대로 행동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때 비로소 Lectio Divina는 완성됩니다.

네 단계를 자세히 보면 중심이 전환됩니다. 처음 두 단계(읽기·묵상)에서는 내가 주체가 되어 말씀을 다룹니다. 그러나 후반 두 단계(기도·관조)에서는 말씀 자체가 주체가 됩니다. 말씀기도에서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음성이 중심이 되고, 관조에서는 그 말씀이 내 삶을 비추고 인도하는 빛이 됩니다.

이런 이유로 ‘Contemplatio’를 우리말로 막연히 “관상”이라고 옮기면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관상(觀象)’은 형상을 봄, ‘관상(觀想)’은 생각을 봄이라는 의미로, 둘 다 내가 주체가 되어 무엇인가를 보는 행위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Lectio Divina의 관조는 말씀이 주체가 되어 나를 비추고 이끄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관조(觀照)”, 곧 말씀이 나를 비춰본다는 표현이 더 적합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라는 시편 119편 105절은 이런 관조의 의미를 잘 드러냅니다.

사실 “관상기도”라는 말은 비교적 최근에 등장한 용어입니다. 최초로 Lectio Divina를 정리한 구이고는 “기도(Oratio)”와 “관조(Contemplatio)”를 분명히 구분했습니다. 피터슨 역시 “Solo”에서 이 구분을 유지하며, 관조를 단순한 명상 상태가 아니라 “말씀과 함께 살아가는 삶”으로 설명합니다.


4-9 유진 피터슨의 “Lectio Divina” (5)

피터슨이 왜 관조(Contemplatio)를 “Live(생활하라)”로 번역했는지 이해하려면, 구이고가 설명한 기도와 관조의 관계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이고에 따르면 기도 단계에서 기도자는 주님과 자신 사이의 깊은 거리를 절실히 인식하게 됩니다. 끝없이 낮은 곳에 있는 인간과, 높이 계신 주님 사이에 스스로 메울 수 없는 간격이 있음을 깨닫고, 말씀의 지식과 체험의 달콤함은 인간의 힘으로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말씀 뒤에 숨겨진 주님의 얼굴은 주께서 보여주셔야만 볼 수 있다는 자각이 깊어질수록, 기도자는 더 간절히 부르짖게 됩니다.

그래서 구이고는 기도를 “영적 갈망”의 단계로 설명합니다. 말씀의 달콤함을 맛보게 해달라고, 천상의 음료 한 방울로 영혼의 목마름을 채워달라고, 문자 뒤에 숨은 주님의 얼굴을 보여달라고 애타게 간구하는 상태가 기도(Oratio)입니다.

그런데 관조(Contemplatio)에 이르면, 주님이 침묵한 채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주님이 먼저 애타게 부르짖는 기도자에게 다가와, 천상의 음료로 목마름을 축여주시고, 하늘의 양식으로 영혼을 살리십니다. 육체적 욕구는 힘을 잃고, 영혼은 새롭게 살아납니다. 새로운 피조물, 곧 영적 존재가 되어 살아가는 상태가 바로 관조이며, 이것이 영적인 삶입니다.

기독교 전통에서 예수님은 신랑, 교회와 성도는 신부로 비유됩니다. Lectio Divina 안에서 기도는 신랑을 애타게 기다리는 단계라면, 관조는 신랑을 실제로 만나 함께 살아가는 단계입니다. 신랑이 신부를 어루만지고, 신부는 신랑과 함께하는 행복을 누리는 삶이 관조입니다.

그래서 구이고는 관조를 설명할 때 “달콤함”이라는 표현을 반복해서 사용합니다. 영혼이 하늘의 달콤함에 취해 있는 상태, 이것이 관조이며, 그가 말하는 “완전한 축복을 받은 영적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 축복된 삶이 어떻게 가능해지는지 이해하려면, 다시 Lectio Divina의 기초가 “말씀”이라는 사실을 떠올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 곧 신랑이라고 고백합니다.

따라서 신랑이 달려와 신부를 만난다는 것은,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와 나와 하나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신랑이 신부를 어루만진다는 것은, 내 안에 계신 말씀이 나를 위로하고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신랑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말씀이 내 안에서 나를 지배하고 인도하는 삶입니다. 결국 최고의 복을 누리는 그리스도인은 말씀에 온전히 지배받으며, 말씀의 능력을 일상에서 경험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관조(Contemplatio)이며, 피터슨이 이를 “Live(생활하라)”로 번역한 이유입니다.


이 은혜를 함께 나누세요



Facebook 공유



Instagram 열기





🔗 링크: https://biblekim.com/D:\Kee_Drive\SynologyDrive\KeeDian/01_Ministry/2026 프락시스 묵상 성경공부/KAMC 2026 묵상훈련 자료 4 과